20120215
세종문화회관


뮤지컬을 즐겨 보진 못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걸 꼽으라면 단연코 <지킬 앤 하이드>와 <노트르담 드 파리>를 꼽곤 했다. 처음엔 음악과 무대 장치가 날 사로잡았다면 그 다음엔 배우들의 열연이, 지금은 가사와 스토리에 매력을 느낀다. 한 편의 영화가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버리듯, 두 뮤지컬은 볼 때마다 '나의 현재'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불편한 질문들을 무심하게 하나로 엮어 버린다.
예술이 축적된 고통의 기억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맞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극에 나오는 인물은 누구도, 어떠한 이유로든 변호할 수 없고 미워할 수 없다. 나는 그 지점에서 비극을 느낀다. 내가 겪었던 얼마 되지 않던 '비극'적(이라 생각한) 일들은, 내 힘으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나를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었던 때였던 것 같다. 가혹하도록 가변적이던 무언가들이 외부를 향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향할 때, 나의 존재 자체를 흔들고 발 딛고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려 할 때, 그 맹렬함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과 공포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극'이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무너뜨리는 행위가 어쩌면 가장 비극적일 것 같다. 콰지모토, 프롤로, 프뤼베를 비극으로 몰아갔던 건, 에스메랄다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는지.
처음 보았을 때, 같이 간 친구에게 '프뤼베'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본능은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언어이자 임시방편의 언어라 생각했기에. 즉 그것은 실수에 대한 면죄부이고 자기 위안을 위한 이기심에 불과한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했던 건 위선이었던 것 같다.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것을 언어로써 규정하고 제도화 시키며 속박하려 드는 것이 오히려 비윤리적이면서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결혼'에 대해 막연히 불안함을 느끼고 거부감을 느끼는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사랑이고 일탈인지,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런 것들을 완전히 구획화하려는 시도는 참 무의미하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일탈일 수도 있으며 진실이면서 거짓일 수 있다. 모든 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드러날 수 없는 법이니, 해석하는 자의 몫인 것이다.
그렇다면 프롤로는 악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신에 대한 사랑과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으로 고뇌하며 울부짖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나약함을 그렇게 처절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여러 번 봐 왔지만, 이번만큼 가슴 깊이 와닿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악하다'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건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가져온 사진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를 부르는 장면이다. 정말로 가끔가다 웃는 모습이 가장 서글퍼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나에겐 콰지모토가 그런 류의 사람인 것 같다. 그의 노래는 늘 에스메랄다를 향해 있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저 흩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역설이야말로, 그 부조리함이야말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 그 엔딩 음악은 모두를 탈진시키는 것 같다.
여하튼.. 좋은 공연이었다. '좋다'라고 단순하게 말하기가 멋쩍을 정도로 늘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는 뮤지컬이다. 오늘은 잡다한 가지를 골라냈지만, 권력, 자유와 속박, 파괴와 건설, 문학의 유용성 등등 가지를 낼 수 있는 주제는 무궁무진하게 많은 작품이다. 언젠가 그런 주제들로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길 바라본다.
세종문화회관
뮤지컬을 즐겨 보진 못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걸 꼽으라면 단연코 <지킬 앤 하이드>와 <노트르담 드 파리>를 꼽곤 했다. 처음엔 음악과 무대 장치가 날 사로잡았다면 그 다음엔 배우들의 열연이, 지금은 가사와 스토리에 매력을 느낀다. 한 편의 영화가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버리듯, 두 뮤지컬은 볼 때마다 '나의 현재'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불편한 질문들을 무심하게 하나로 엮어 버린다.
예술이 축적된 고통의 기억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맞다면 <노트르담 드 파리>는 나에게 있어 진정한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극에 나오는 인물은 누구도, 어떠한 이유로든 변호할 수 없고 미워할 수 없다. 나는 그 지점에서 비극을 느낀다. 내가 겪었던 얼마 되지 않던 '비극'적(이라 생각한) 일들은, 내 힘으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나를 제외하곤 아무 것도 없었던 때였던 것 같다. 가혹하도록 가변적이던 무언가들이 외부를 향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향할 때, 나의 존재 자체를 흔들고 발 딛고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려 할 때, 그 맹렬함 앞에서 느끼는 무기력과 공포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비극'이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무너뜨리는 행위가 어쩌면 가장 비극적일 것 같다. 콰지모토, 프롤로, 프뤼베를 비극으로 몰아갔던 건, 에스메랄다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는지.
처음 보았을 때, 같이 간 친구에게 '프뤼베'에 대한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본능은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언어이자 임시방편의 언어라 생각했기에. 즉 그것은 실수에 대한 면죄부이고 자기 위안을 위한 이기심에 불과한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했던 건 위선이었던 것 같다.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것을 언어로써 규정하고 제도화 시키며 속박하려 드는 것이 오히려 비윤리적이면서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결혼'에 대해 막연히 불안함을 느끼고 거부감을 느끼는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사랑이고 일탈인지,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이런 것들을 완전히 구획화하려는 시도는 참 무의미하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일탈일 수도 있으며 진실이면서 거짓일 수 있다. 모든 것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드러날 수 없는 법이니, 해석하는 자의 몫인 것이다.
그렇다면 프롤로는 악한 인물이었을까. 그가 신에 대한 사랑과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으로 고뇌하며 울부짖는 부분이 있다. 인간의 나약함을 그렇게 처절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여러 번 봐 왔지만, 이번만큼 가슴 깊이 와닿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결코 '악하다'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건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가져온 사진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 <춤을 춰요 에스메랄다>를 부르는 장면이다. 정말로 가끔가다 웃는 모습이 가장 서글퍼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나에겐 콰지모토가 그런 류의 사람인 것 같다. 그의 노래는 늘 에스메랄다를 향해 있지만, 한 번도 그녀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저 흩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역설이야말로, 그 부조리함이야말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래서 그 엔딩 음악은 모두를 탈진시키는 것 같다.
여하튼.. 좋은 공연이었다. '좋다'라고 단순하게 말하기가 멋쩍을 정도로 늘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는 뮤지컬이다. 오늘은 잡다한 가지를 골라냈지만, 권력, 자유와 속박, 파괴와 건설, 문학의 유용성 등등 가지를 낼 수 있는 주제는 무궁무진하게 많은 작품이다. 언젠가 그런 주제들로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길 바라본다.
태그 : 노트르담드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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