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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빈 국립오페라극장 실황 <안나 볼레나> 기대평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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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상


0.
다시 시작하려 한다.

1.
아침부터 가을비가 매섭게 내렸다. 우산 끝에서 또옥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걷는 것은 늘 재미있는 일이다. 꼭 가을비여야만 한다.

2.
정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 하반기에는 늘, 마음이 스산해진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김영하,문학동네


책 표지를 보자마자 영화<라붐>의 명장면이 생각났다. 다른 게 있다면 주위와의 단절을 이루게 하는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자폐적인 공간 안에 갇히고 만다는 것.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버려진 존재'라는 점에서 뿌리를 같이 한다. 외로움에 면역되어 무엇이 외로움이고 무엇이 두려움인지 알지 못하는, 어쩌면 관심조차 없는 인물들인 것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제목은 델리 스파이스의 곡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 역시 이상하게도 그 노래를 흥얼거리던 느낌과 맥을 잇는다. 슬픔을, 멍하게 서서 중얼거리던 그 때의 느낌으로 번져 있는 책이었다.

이번 신간은 내가 읽었던 기존의 김영하의 책들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냉정하고 무심하게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은 맞지만, 그 뒤엔 묘한 여운이 남는, 책을 덮고 울고 싶어지는 때가 간간이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신간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나는 그가 오랜 시간 끝에 낸 장편 소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반가웠는데, 그 내용조차도 매력적이라 더더욱 반가웠다.


제이의 독서는 아파트 재활용품 처리장에 나온 책들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므로 계통도 체계도 없었다. 자기계발서에서 건진 듯한 잠언과 종교적 교훈과 뒤섞였고 싸구려 대중소설의 잔뜩 힘을 준 비장한 문체가 로맨스의 극적인 구성으로 스며들었다. 제이가 다른 사람의 인생이나 사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때는 그가 사용하는 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내 삶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 그의 말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제이에게 가 닿는 내 모든 절실한 문제는 흔해 빠진 재혼가정에서 벌어지는 별반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로 전락해버렸다. 어쩌면 제이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한심한 말재주가 제이의 상상력을 제한했거나. 내가 당장 겪고 있는 일조차도 막상 말로 옮기면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곤 했으니까. 그래도 제이는 다를 줄 알았다.
p.148


인물의 내면과 상황을 이렇게 담백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던 구절이기에 넣어본다.



20120306 한겨레/30대 이하에게 '나꼼수'는 '월간조선'이다 스크랩


등록 : 2012.03.05 15:22
수정 : 2012.03.05 19:37

나꼼수 대전콘서트 장면. 딴지일보 제공

청년 세대의 본격 정치에 대한 갈증을 파고든 ‘나꼼수’
기계적 중립에 기갈난 대중에게 정파적 관점까지 제공

 나는 김어준을 좋아한다. 특히 그가 만든 <딴지일보>를 좋아한다. <딴지일보> 최고의 기사는 ‘허경영 연쇄 인터뷰’다. 줄기차게 대권에 도전하고 있는 허경영은 ‘정신나간 군소 대선후보’였다. 기성 언론의 엄숙주의·엄밀주의에 입각하면, 이런 정치인은 아예 보도하지 않고 무시해야 옳다. 그래야 독자들의 합리적 판단에 혼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딴지일보>는 줄기차게 허경영에 매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허경영의 과대망상과 박정희의 독재정치 사이에 가공할 친연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진지한 얼굴로 정치를 말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허경영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은근히 비꼬며 질문했다. 박정희를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허경영의 과대망상은 현대 한국 정치의 핵심적인 파토스이자 로고스다. 그 실정을 우리는 2012년에도 목도하고 있다.

기자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은 ‘나꼼수’

 <나꼼수>는 <딴지일보>의 어떤 진화다. 김어준의 2000년대 프로젝트가 <딴지일보>라면 2010년대 프로젝트가 <나꼼수>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나꼼수>를 청취한 적이 없다.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다. <딴지일보>에서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곤 했던 나에게 왜 <나꼼수>는 매력적이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나꼼수>는 정치전문지다. 올해 총선·대선 일정과 맞물리는 특수매체다. 한국의 종합일간지는 삼라만상을 종합하는 게 아니라, 주로 청와대·정당·기업·법조 등 권력기관의 동향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즉 ’종합뉴스’를 내걸지만, 실제로는 ‘권력자 관련 전문 뉴스’를 다뤄왔다. <나꼼수>의 영역과 기성 언론의 영역은 서로 겹친다.

 <나꼼수> 애청자로부터 간간이 “이런 이야기를 <나꼼수>가 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대부분은 현직 기자인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금세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었다. 반면 <딴지일보> 콘텐츠의 거의 전부는 현직 기자인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일이었다.  

 <나꼼수> 열풍은 바로 이 상황에서 비롯한다. 기자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꼼수>는 평범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나꼼수>에 대한 기성 언론의 불편한 심경도 이와 관련이 있다.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 <딴지일보>를 경계하거나 냉소한 기성 언론은 없었다. 반면 <나꼼수>는 끊임없이 기성 언론을 성가시게 한다. 기성 언론이 독점적으로 다뤄온 이슈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정치 뉴스가 과잉 생산되고 있다”고 기자들은 오해 또는 착각한다.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40대 이상 중산층 남성에게만 정치 뉴스는 과잉 공급된다. 출입처를 중심으로 권력자·명망가·권위자를 만나는 뉴스 생산자, 즉 기자들은 최고 권력 사이에 벌어지는 ‘파워 게임’의 구도로 기사를 써왔다. 매일 아침 신문 들고 화장실 가는 사람, 밤 9시만 되면 꼬박꼬박 뉴스를 챙겨보는 사람이 그런 기사를 소비한다. 이들은 연령대로는 40~60대, 계급적으로는 중산층 이상 집단이다. 이들은 분명 정치 뉴스를 과잉소비한다.

 그런데 30대 이하로 내려가면 사태가 달라진다. 10~30대에 이르는 청년층은 아침마다 신문 들고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이들은 인터넷에 기초한 정보습득에 길들여졌다. 또한 그들은 생존경쟁에 몰입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화두는 정치 담론이 아니라 스펙 관리다. 취향·기호는 학습·경험에 기초한다.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고기를 즐긴다. 한국의 청년 세대는 신문을 정독한 적이 없고, 방송뉴스를 챙겨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한국은 ‘정치 뉴스의 과잉’이 아니라 ‘정치 뉴스의 부재’가 지배하는 시공간이다.

 이로부터 <나꼼수>가 착안한 시장이 생겨났다. 엄숙주의에 “똥침을 날리겠다”며 등장한 <딴지일보>가 기성 언론의 틈새 시장을 노린 반면, <나꼼수>는 본격 정치 뉴스·논평·비평의 주류에 뛰어들었다. 정치 뉴스에 제대로 노출된 적 없는 10~30대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한국 정치에 대해 궁금하다면 <나꼼수>를 봐야 한다는 평판이야말로 그들이 정확히 의도한 목표다.

맥락, 배후, 욕망, 그리고 강력한 관점 제공…

 <나꼼수> 열풍의 핵심은 그들이 본격 정치 뉴스를 다룬다는 사실에 있다. 30대 이하에게 <나꼼수>는 <월간조선>이다. <월간조선>은 ‘탐사·심층 보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실제로는 맥락, 배후, 욕망, 그리고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 사건의 주인공들이 어떤 연관을 서로 맺어 어떤 욕망을 위해 무슨 일을 벌였는지 폭로하는 방식으로 뉴스를 생산해왔다. <월간조선>을 읽고 나면, “신문·방송 보도에 나오지 않은 더 큰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쾌감을 위해 지속적으로 월간지를 소비하게 된다. 지루하고 복잡한 정치 뉴스를 주무기 삼은 월간지가 그토록 오랫동안 충성독자를 거느린 ‘장수 매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나꼼수>가 극우 월간지와 똑같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월간조선>과 <나꼼수> 모두, 기성언론의 기계적·중립적 정치보도에 기갈난 대중에게 △뒷이야기 △주요 (배후)인물 △사건 사이의 큰 맥락 △맥락을 파악할 비평적 관점 △더 나아가 진위, 선악, 흑백을 분명히 하는 ‘정파적 관점’까지 제공하면서 독창적인 정치 보도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두 프로젝트는 보수와 개혁, 노년층과 청년층, 두꺼운 활자매체와 기동력있는 팟캐스트 등으로 구분되지만, 각각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확인이 미흡하여 정치 선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두 매체(<나꼼수>와 <월간조선>)의 한계와 위험은 엄연하다. 실제로 <월간조선>은 맥락을 드러내는 일 대신 정치 선동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변화(또는 퇴화)해왔다. <나꼼수> 역시 그 위험한 유혹에 휘말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치보도의 정수는 주요 행위자를 잇는 복잡한 고리를 규명하여 풍부한 맥락과 함께 날카로운 비평을 함께 제공하는 데 있다는 점을 두 매체는 반세기를 격차로 하여 거듭 입증해 보였다. 그 목표를 ‘완벽하고도 탁월하게’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보도 방식이 신문·방송에 비해 깊은 울림을 준다는 점만큼은 웅변해 보였다.

 특히 기성 매체가 “신문은커녕 책도 안 읽는다”며 가볍게 여겼던 30대 이하 청년 세대에게도 이런 본격 정치보도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꼼수>는 완벽하게 입증했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정치적 잠재의식을 꿰뚫어보면서, 이면·맥락·관점을 동시에 제공하는 역동적 정치 보도를 내놓았다.

 출입처를 중심으로 취재하는 기성 언론의 기자는 ‘권력자의 눈으로’ 사건을 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권력자의 ‘음험한 욕망’을 눈치채지만, 기성 언론에서 훈련받은 바, 이른바 ‘객관보도’의 규준에 따라 ‘이 권력자와 저 권력자’를 동등하게 배치하여 뉴스를 생산한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진짜 맥락은 종종 자취를 감추고, 비평적 관점이 형성될 만한 핵심 사실은 희미해진다. 독자·시청자가 기성 언론에서 갈증을 느끼는 것의 핵심은 “뉴스를 읽고(보고) 나서도 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반면 <나꼼수>는 누구의 무슨 잘못인지 공개적으로 지목하고, 그 뒤에 작동하는 권력의 숨은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어 비꼰다. 뉴스 소비의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꼼수> 열풍에 대해 기성 언론 기자들 사이에 냉담과 냉소가 번져 있다. “‘객관보도의 규준’에서 한참 빗나간, 기초적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함부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는 평판이 없지 않다. 여기서 한국 기자들이 신봉하는 ‘객관보도 규준’의 한계에 대해 상술하진 않겠다. 그들이 과연 ‘객관보도의 규준’이나마 충실했는지도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객관보도의 규준은 어디까지나 기자들 사이의 암묵적 규칙일 뿐, 뉴스 소비자에겐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점을 짚어야겠다. 독자가 보기에는 ‘객관보도의 규준에 충실했기 때문에 좋은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어떤 규준이 놓여있건, 하나의 텍스트가 온전히 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읽혀지는(보여지는) 것이 좋은 기사’다.

명약관화한 ‘나꼼수’의 운명

 <나꼼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김어준은 ‘(기계적) 객관보도 규준’에 묶여 어떤 카타르시스도 제공하지 못하는 기성 언론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고, 자신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매스미디어가 바로 그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조직했다. <나꼼수>를 향해 언론의 규준, 윤리의 잣대 등을 들이대는 것에 대해 김어준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보도가 필요하다면 신문을 봐라, 윤리적 취재·보도가 아쉽다면 방송을 봐라. 우리는 정치권력을 속시원하게 비판할 때 생성되는 카타르시스만 제공한다.…” 아마 김어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꼼수>의 영향력이 앞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 스스로 ‘쇠퇴’를 계획했다. 총선·대선까지 운영하다 접겠다는 것이 김어준의 뜻이다. 다만 그것이 제공하는 ‘카타르시스’의 강도가 앞으로 어찌 변할지는 지켜봐야 하겠다. 카타르시스는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폭로’를 내놓거나, 더 강력한 ‘비평의 레토릭’을 활용해야 할텐데, 더 강한 카타르시스를 의도할수록 위험도 커질 것이다.

 이 점에 한해 <나꼼수> 열풍에 대한 우려가 있다. 하나의 이슈, 하나의 관점을 밀고 나가면 밀도 높은 정치적 대중을 거느릴 수 있다. 다만 그 이슈와 관점이 붕괴하면, 그 대중은 쉽게 흩어지거나 고립감에 기초한 광기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 우리는 황우석 사태에서 확인했다. 과학·의학·윤리의 문제를 뭉뚱그려 황우석 개인에게 열광했던 한국의 대중은 일체의 관심을 모두 잃어버렸다. 극소수만 남아 지금까지도 황우석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뉴스는 감정적·정서적으로만 소비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이성과 감성이 혼융된 영역이다. 좋은 정치를 위해선 직관-열광과 함께 분석-냉정이 필요하다. 정치를 ‘카타르시스’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대중은 정치냉소-광기정치의 양 극단을 오갈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덧붙일 일이 남았다. 앞서 밝혔듯이 <나꼼수>는 길어야 1년 정도 유지되다가 스스로 퇴장할, 기성 언론 외곽의 해적 미디어다. 그 미디어가 모든 중대 사안이 아닌 특정 사안에 몰입하고, 모든 관점이 아닌 특정 관점을 제공하며, 냉철한 공중이 아닌 열광적 대중을 잠시 동안 생산한다고 하여, 과연 그것이 그토록 잘못일까.

1년쯤의 난장, 어때서

 정파적 이익에 입각한 왜곡 보도, 극단으로 치닫는 이념편향적 비평으로 해방 이후 한국 사회 기성 언론을 지배한 <조선일보>가 엄연히 ‘엄숙한 언론’을 대표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침을 거듭하며 나팔수 방송만 거듭하는 KBS가 (사실상) 국내 유일의 공영방송인 현실에서, <나꼼수>가 한 1년쯤 난장을 벌인다고 하여, 과연 그것이 한국 언론에 그토록 창피한 일일까. 아마도 그 반대일 것이다.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ahn@hani.co.kr


동감하는 바. 나꼼수는 일반인들에게 정치에 대한 친밀감을 만들어 주었다는 데 의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와 다분히 진지해야 할 사안을 타블로이드지의 기사마냥 유희적으로 만들어 버린 태도에 대한 비판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중들의 욕망의 대리인으로서의 쿨(?!)한 모습은 유쾌했지만 너무 나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나꼼수의 폭발적인 호응은 어느 정돈 정론지의 역할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것일 것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과 자조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언론이라면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모색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맥락을 벗어난 얘기지만, 가끔 사람들은 진지해야 할 것과 진지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욕구를 해소하는 법을 모를 때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가끔 '떼창'의 행동을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발견한다. 억압된 분노의 배출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노는 법'을 너무나 모르는 것은 아닌지 가끔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더글러스 맥그라스 영화


킬링타임 정도로 생각했던 영화인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영화의 소재는 '워킹맘'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갈등 요소 역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워킹맘의 비애라고나 할까. 충분히 공감했고, '미국'의 현실이기 이전에 '한국'의 현실이기도 했고 곧 닥칠 '나'의 현실이기도 했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직까지도 일을 하면서 양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사실이 두렵기도 하다)

사실 일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복지 정책에 대해 이중잣대라거나 역차별이라고들 많이 주장한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한 이상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게 바로 '육아'의 문제일 것이다. 어찌됐건 육아에 관해선 대부분 여성이 상당 부분을 책임질 수밖에 없기에 사회적 차원에서 이를 충분히 감안해 주어야 하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그 정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만약에 남자가 애들 보러 집에 가잖아요?  그럼 그 남자는 이타적이고, 사랑 넘치고 부성에 넘치는 롤모델이 되죠. 근데 여자가 애가 아파서 직장에서 나가면 그 여자는 정돈도 못하고 책임감도 없는 데다가 일에 잘 신경도 안 쓰는 여자라고 욕을 먹을걸요?'

'직장에서 당신이 남자처럼 행동하면 사람들은 당신한테 거질고 대하기 어렵다고 하죠. 그렇다고 여자처럼 행동하면 감정적이고 대하기 어렵다고 해요. 그냥 대하기 어렵다는 말은 남자가 아니라서 하는 말이에요'

의 대사가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실제를 생각해봤을 때 그러한 엔딩은 무리인 것도 같다.


ps. 모유수유를 해야만 진정한 '엄마'인 듯하게 묘사하며 알파맘과 워킹맘 등 각종 수식어를 동원해 모성을 신격화하려드는 광고나 기사들, 정말 넌더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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